1989년 11월 9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날의 베를린
베를린 장벽 붕괴 1989년 11월 9일이고 공식적 독일 통일은 1990년 10월 3일임.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그야말로 통일을 위한 모든것.
양찰북 작가인 귄터 그라스를 대상으로 박사 논문을 쓰게됐는데
귄터 그라스는 독일 통일을 강력하게 반대했다고함.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독일 통일을 연구하며 책을 발간.
통일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변화가 독일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까
1989년 4월에 독일로 간 선생님. 7개월 후 베를린 장벽이 붕괴.
그당시 길거리에서 한국 유하생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었는데 눈가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고함.
베를린 장벽 붕괴 중계를 보며 우는 유일한 외국인. 다른 외국인들은 크게 공감하지 못할 일이죠.
분단의 현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던 그날.
요술거울: 앞에서면 일그러져 보이는 거울을 말해요.
독일은 우리에게 일그러진 거울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잖아요.
독일이라는 거울에 한국을 비추어보면 어딘가 일그러져 보이는 듯한 느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68혁명을 알아야한다고해요.
현대 사회를 변화시킨 결정적 요인이 된 68혁명.
우리가 아는 독일은 1. 과거 청산을 잘한 나라.
2. 복지 국가로서 위상. 3. 통일을 잘한 나라.
이 모든게 68혁명 이후의 일인거에요. 68혁명 이전에는 전혀 이렇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국만 68혁명이 없었어요. 첫번째 강연 68혁명의 부재. 두번째는 통일에 대한 이야기.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분단 상태가 한국을 기형적인 국가. 병든 사회로 만들었고
한국인을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독특한 성격 구조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독일과 비교하며 우리를 좀 더 알아보는 시간.
세계가 보는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죠.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에서도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178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비교한건데 한국은 몇위일까요?
선생님이 생가하기엔 사실상 1위라고 그 이유가 인구가 적은 상위권 나라들.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에 적합한 조건인거에요.
30-50클럽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이상, 인구 5000만이상인데 이에 해당하는 국가는 7개국뿐임.
30-50클럽은 미국, 독일, 프라읏, 일본, 영국 , 이탈리아, 한국인데 7개국 중에서 우리가 1등임.
자유민주주의 국가 지수 순위를 보면 한국,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임.
한국은 바닥에있다가 수직상승으로 올라간건데 그 계기가 2016년 촛불집회에요.
민주적인 절차로 탄핵을 이뤄낸 시민들.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보여줬죠. 홍콩과 대만에서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진 거예요.
촛불을 들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안타까운 상황. 한국의 촛불집회를 비중 있게 다룬 독일의 공영방송.
독일 특파원과 인터뷰를 한 선생님. " 우리는 아주 위대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라고 말하면서 ' 내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고하네요.
위대한 민주주의 역사의 숨은 뜻은?
나아져야 하는데 계속 반복했다는 거죠.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운동이었떤 4.19혁명, 1년만에 5.16 군사 정변으로 무너짐.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정권의 탄압으로 유린됨.
6.10 민주항쟁은 선거를 통한 군사정권의 재집권. 심지어 전 세계가 극찬하는 촛불혁명을 탄핵이 기각될 시 비상시 계엄을 계획했던 국군기무사령부.
한국민주주의 역사는 군사 쿠데타의 역사이기도 해요. 위대함과 동시에 취약함을 보여주는 결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왜 불안할까?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에요.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일상에서는 가부장적인 부모, 권위적인 교사, 갑질상사가 되는거죠.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 괴리.
아직도 갈길이 먼 일상 속의 민주주의.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한국에 68혁명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1968년 5월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변혁운동으로 구호가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은? 취업, 결혼등 살면서 요구되는 절차들.
혁명의 불길은 파리에서 시작되어 서구 세계로~
68혁명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왜 갑자기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바랐을까?
68혁명의 결정적 요인은 베트남 전쟁이에요.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한 전쟁으로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됨.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된 것은 60년대 중반이에요.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매체의 변화!!! 1965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tv가 보급돼요.
전쟁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되니까
젊은 세대에 퍼진 도덕적 회의감,
세계를 위협하는 핵무기를 비축하고도 계속되는 미, 소 간의 힘겨루기.
" 참으로 부조리한 세상이다."
"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와 가치들이 틀린 것은 아닐까?"
근본적인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고 기존의 질서를 다양한 형태의 억압으로 인식.
독일의 베를린, 이탈리아의 로마,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마드리드, 동유럽까지
미국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까지 건너와 일본 도쿄까지~가죠. 다왔는데 대한해협을 못 넘음.
지금 복기를 해보면 한국에 오지 못한 68혁명이 반세기 동안의 문화 지체 현상을 만들었다고해요.
세계적으로 번져 나간 68혁명 어떤 해방을 원했던 걸까?
나라마다 억압의 형태들이 달랐는데 68년 당시 미국은? 반전운동중이었어요.
흑인 운동이 이때 일어나요. 미국의 68혁명은 백인의 지배로부터 흑인의 해방.
흑인운동단체인 블랙팬서, 흑인해방운동가인 마틴루터킹이 대표적임.
프랑스에서는 어떤 문제가??
프랑스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 프랑스의 68혁명은 학생과 노동자 연대를 통해 자본주의 문제점을 비판함.
그러나 과격한 투쟁방식으로 대중의 지지를 상실함.
전공투 안에서 서로를 죽이기까지 했다고하네요. 결국 내부적으로 와해한 전공투.
소위 양심적 지식인으로 통하는 일본의 68세대.
만엔 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반핵운동을 전개한 오에 겐자부로 소설가, 베트남 전쟁 반대에 앞장선 일본 대표 진보지식인인 와다 하루키 동경대 교수가 대표적이라고해요.
그렇다면 독일의 68혁명은?
그전에는 반성이 없었다고해요.
1968년 서독의 3대 총리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는 나치당 출신이에요.
여전히 독일에 남아있던 나치의 흔적들. 총리였던 키징거에게 있었던 일이
사진속 여성은 베아테 클라르스펠트인데 68세대로 키징거의 뺨을 때린 클라르스펠트임.
그로부터 1년 후 서독 최초의 정권 교체가 4대 총리인 빌리브란트.
총리가된이후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한 빌리 브란트는 나치의 만행에 용서를 구합니다.
처음부터 무릎 꿇을 생각은 하지 못했던 빌리 브란트. 말로 담기에는 부족했던 진심.
노르웨이에서 나치 저항운동을 했던 빌리 브란트는 반 나치의 상징이에요.
"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어 독일이 일어설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국민의 반나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까요? 68이 되면서 그런 분위기도 있었다고
1968년 이후 독일의 역사교육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 집권 시기가 12년인데
히틀러의 시기는 짧지만 역사 교육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음.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않도록 하는 역사 교육.
과거의 잘못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빌리 브란트의 용기.
새로운 독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됐다고해요.
라인강의 기적 그 과정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하죠.
빌리 브란트 정부 이후 복지국가 체제를 갖추게 됨.
유학시절에 겪었던 선생님의 일화로 독일 대학원 입학에 필요했던 서류들 그중 하나가 재정증명서인데
우리에겐 당연하지만 독일에서는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이 특이한 일인거에요.
등록금은 1946년부터 사라짐. 2차 세계대전 직후 전 지역이 폐허였던 시기에 등록금이 없어지기 시작함.
당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학생인 카를하인츠 코흐는 수업료는 위법이라며 소송을 제기함.
한국처럼 높은 대학 등록금은 독일에선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죠.
그러한 권리 의식이 한국에 없는 거죠. 왜냐면 68혁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생활비는?
교육사회.
바푀크라고해서 청년에게 ㅅ생활비를 지원하는 제도로 취업후 일부를 갚는 형식이라고하네요.
한달에 70~80만원정도 준다고해요.
요건 좋은 제도 인거 같네용..ㅠㅠ 공부하려 생활비 벌으랴...거기에 학자금대출 갚으랴..ㅠㅠ 우리나라 학생들 겁내 힘들고 바쁘게 사는데.
한국과 비교해 대학 입학률이 낮은 독일
마셜플랜은 2차 대전후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계획인데, 마셜플랜, 라인강의 기적으로 교육 재정을 확충함.
당연히 세금도 상승하죠.
모든게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고해요. 정책에 대한 체감률이 중요한데
미국은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세금이 낮은 미국에 비해 독일, 프랑스는 높은편이에요.
어느나라가 조세저항이 더 심할까요??
실업자가 된다? 한국에선 벼랑에 서는거잖아요.
하지만 독일은 실업수당, 재교육 프로그램까지 제공함. 자식들은?? 학비없고 생활비걱정이 없죠.
세금이 아깝지 않은 독일의 복지혜택.
한국 정치인들이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걸 거의 못봤다고.
오로지 경쟁력, 경제발전만 얘기함.
사회적 정의를 위해 시작된 독일의 생활비 지원.
부짓집 아이들은 공부만 하는데 가난한 집 아이들은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육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빌리브란트가 꿈꿨던 독일의 교육사회.
총리후보시절 빌리 브란트의 선거구호.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라는 뜻이에요.
민주주의 다 해보자. 어디까지 할수 있는지. 이게 선거 구호였어요.
민주주의라고 하면 모든걸 포괄한다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에서 정치 민주화는 최고죠.
그렇다면 사회 민주화는? 사회 민주화란? 사회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치적으로 활동할수 있는것을 말해요.
학교, 회사등 작은 집단에서부터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
독일의 사회 민주화 사례는?
당시 31세 나이로 총장이 된 롤프 크라이비히.
68년 이전까지만 해도 보수적이었던 독일 대학.
그에따라 교수들에게 만연했던 권위주의. 68년 이후 학생들의 주장이 대학을 구성하는 주체가 권리를 동등하게 나눠 가져야 한다.
대학을 구성하는 3주체는? 독일에서 행정직은 별도의 노동조합으로 분류함.
독일에서 대학은 학문공동체에요. 교수와 학생의 중간층인 조교와 강사.
교수, 학생, 조교 세 그룹이 권리를 동등하게 가지죠.
한국은 사립대가 87% 에요. 세계에서 사립대 비중이 가장 높음.
미국은 최상위 대학들이 사립대.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프린스턴, 브라운. 일종의 서열화가 되었죠.
그런 미국도 대부분은 주립대, 시립대에요.
1969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열린 총장선거.
당시 롤프 크라이비히는 조교였어요. 58% 득표로 총장에 당선됨. 한국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일이죠.
4년후 재입후보 또 당선됌.
직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들. 경제적 강자에 고통받는 한국 사회.
가장 민주화가 안된 영역이 기업이죠. 기업의 소유자가 모든것을 결정하는데 독일에서 갑질은 거의없음.
한국의 갑질은 개인의 인성 문제도 있지만. 제도적으로 갑질이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아는 독일 기업은? *디다스, BM*, *멘스등은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들 이사회 50%가 노동자에요.
50%가 노동이사가 되도록 법으로 제정됨. 이사회의 절반은 노동이사로 나머지 절반은 주주이사임.
대개 주주 이사들은 이해관계가 갈라져 있어요. 노동자들은 대체로 이해관계가 동일하죠.
사장이 되려면? 노동자의 뜻이 중요하게 되죠.
그야말로 노동자가 사장을 세우는 격이됨.
노동자들의 입김이 세면 위기에도 복지, 임금 상승만을 주장하진 않는지?
노동이사가 있기 때문에 위기에 강함.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에도 독일은 성장을 했죠.
노사갈등이 거의 없고 노동자들이 회사의 경영 전반을 다 아니까 미리 노동시간과 임금을 낮춤.
우리는 위기때 노사갈등이 심해지잖아요. 자르고 ..
독일이 이런 제도를 만들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 놀라운 것은 미슈닉은 자유민주당 원내대표라는 것.
일반적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는 당은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인데 기업을 대변하는 정당의 자유민주당 원내대표가 노사공동결정제를 발의함.
"우리 시민들은 국가 시민으로서는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핵심적 주권을 가진 주인이다."
"경제 시민으로서는 노예로 산다."
표결결과 찬성 389 반대 22 압도적인 찬성으로 노사공동결정제가 통과됨.
진정한 경제민주화의 실현. 노사 간의 평등한 관계로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한 독일.
그로인해 유럽을 이끄는 경제 강국이 되다.
민주주의 어디까지 할수 있을까?
68년 이전학생들이 교수를 부르는 방식은?
이런식으로 불렀다고해요. 68혁명 이후에는 그냥 딱 교수를 이름만 부름.
이런게 문화혁명이죠. 많은 교수가 저항도 했지만 68세대의 젊은 교수들은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임.
일부 기업에도 이름만 부르는 문화가 등장.
문화는 인간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거예요. 남성, 여성, 교수와 학생, 부모와 자식, 부부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화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이 68혁명의 결과가 됩니다.
코뮤니즘, 커뮤니티. 많은 번역이 잘못됐는데 코뮤니즘을 공산주의로 번역해서 재산만 공유하는 것으로 오해를 함.
코뮌= 공동체라는 뜻이에요.
68년 전후로 생긴 코뮌들. 그중 첫번째 독일 퀼른 지역의 코뮌 1. 성공동체에요.
연애, 재산등 모든 독점에 대한 반대를 하는 것이 코뮌?
다양한 민주주의에 도전했던 68세대. 코뮌운동은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음.
우리는 성을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를 통해서 한 남자와 한 여성이 만나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코뮌 운동가들은 일부일처제는 재산 상속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함. 이를 해체하기 위한게 성공유라고해요.
하지만 오래 지속될 순 없었음.
그러나 의미 있는 실험이었던 코뮌운동이었음.
탈물질주의인 소비의 문제까지 확장됨. 독일에는 소비 포기운동이 있었다고해요.
독일의 환경도시인 프라이부르크
슈바르츠발트는 숲의 나무를 자르고 발전소를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됨.
환경을 지키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기로함.
독일 대학생들의 소비 포기운동으로 머리 기르기를 시작함. 그리고 뜨개질도 해요.
일종의 시위 (Demonstration)로 소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환경을 위해 소비를 포기하겠다는 독일의 젊은 세대.
지난 9월 23일 UN 기후행동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태양광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16살의 툰베리.
미래 생명에 대한 책임. 미래 생명이 또 살아야 할거 아니에요.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에요. 개인의 욕망을 위한 소비는 잘못됐다는 생각.
환경을 위한 생태주의 교육의 결과에요.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인간의 지배로부터 자연의 해방.
목색당 활동도 이때부터! 해방의 개념을 확장한거에요.
68혁명이 대한해협을 못건넌 이유는?
철통 방어된 68혁명. 당시 한국은? 가장 강력한 반공 국가였던거에요.
결정적 요인은 베트남 전쟁때문인데. 베트남 전쟁을 전 세계가 반대할 때 무려 32만이라는 숫자의 군인들을 파병했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을 알아야 왜 파병을 했는지 알수 있어요.
5.16 쿠데타를 좌익 쿠데타로 본 미국은 과거 박정희는 남조선노동당인 남로당에서 활동을 함
대구를 보수적인 지역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에요.
당시 남로당 세력이 가장 강했던 대구.
반공주의로 박정희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야했음. 당시의 극단적인 반공주의 배경에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도 있음.
베트남 전쟁이 터지니까 제일 먼저 손을 든 거죠. 문제는 북한이에요.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자가 호찌민이었고 호찌민이 김일성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파병에 소극적이었던 북한.
대신 남한 파병을 막으려는 작전을 시작합니다. 남한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시작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
당시 남한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었죠.
무려 300여회에 걸친 무력 충돌이 발생함. 전쟁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어린 시절,
게릴라전의 결과는? 결국 안보 문제로 인해 파병을 중단함.
1968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병영사회화.
1968년 이전에는 호적이었는데 주민등록법을 만듭니다. 그이유는? 간첩색출을 위한 것임.
국민들을 예비적인 병력으로 정신교육을 시켜야할거 아니에요. 국민교육헌장이 등장함.
예비군 훈련도 이때부터 시작함. 1969년에 학교도 병영화됨. 교련 수업이 시작됩니다.
교련수업은 학교에서 총검술을 가르쳤습니다. 전 세계가 억압으로 해방되던 그 무렵
한국은 68혁명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함. 오히려 깊은 억압으로 빠져든..
한국은 군사사회, 병영사회가 되었죠. 그렇게 세계의 흐름에 뒤처진 한국.
우리에게 너무 당연해져 버린 권위주의, 군사문화, 부족한 인권 감수성
86세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을 말해요.
정치적 민주화를 이끌었던 세대임.
잔혹한 군사독재에 맞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졌던 86세대.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86세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86세대의 민주화운동. 세계가 경탄하는 한국 민주주의는 86세대가 이룬 업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을 바꾸지 못했는지?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는 86세대의 과잉 대표성때문이에요.
40대 이하 국회의원은 몇명이에요? 덴마크는 40세미만이 41% 한국으로 치면 300명중 120명이 40대 미만
우리는 두명!! 0.6% 임. 정작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는 젊은 세대의 대표성은 미미함.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이에요. 국민을 대표하는 곳. 전문적인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님.
대의에서 중요한 것은 세대 대표성이에요.
교사보다 교수출신 국회의원이 훨씬 많음.
의회는 다양한 직업, 직능에 비례하여 구성되는 것이 바람직해요.
언론인, 법률가, 교수등 소수만이 대표되는 한국의회. 그래서 의회 민주화가 안됨.
한국사회에서 기득권이 된 86세대를 어떻게 볼것인가. 정치 민주화는 이뤘지만 사회, 경제, 문화 민주화는 실패함.
군사독재 시대의 비정상사회가 민주주의 시대의 비정상사회가 됨.
교육개혁, 재벌개혁, 노동개혁, 하나도 이루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수 있을 텐데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남긴말이 있어요.
브레히트의 예리한 통찰력.
요즘의 꼰대론과도 깊은 관계가 있어요. 86세대의 결정적인 한계는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정치적 비전이 부족했다는 것.
당시 86세대가 가졌던 목표는 어떻게 군사독재를 넘어설 것인가. 내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시대가 올까?
민주사회가 멀게만 느껴졌던 암울한 그때. 그 이상을 상상하기 어려웠어요.
이후 86세대는 어떻게 되었나? 독일의 68혁명 세대는 주로 학교와 언론사에 취직을 합니다.
제도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바꾸려고 했음.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새로운 독일이 가능했죠.
독일의 학교는 경쟁을 시키지 않는다.?
68혁명 이후 달라진 교육 철학.
경쟁이 극에 달하면 나치즘이 부활할수도 있어요.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유대인을 차별하고 탄압한 나치.
학교에서 경쟁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우리가 가진 정의의 기준이 뭔가요?
모든것이 점수로 결정되는 사회 과연 이것이 정의 일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줘야 해요. 한국의 교육 현실은 어떠한가..
엘리트교육체제, 학벌체제, 문제의식이 전무함 그결과 경쟁의 강도는 세지고 사교육 시장이 커지기까지.
기존 질서를 더욱 악화시키죠. 86세대의 또다른 문제점은 도덕적 우월감이에요.
이것도 86세대의 중요한 한계점이기도 해요. 86세대의 도덕적 결단과 희생으로 한걸음 나아간 한국사회.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어요. 86세대가 맞서던 상대는 기회주의적인 수구세력임.
그래서 그 도덕적 우월감이 86세대를 무능하게 했다고 봐요.
최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86세대의 민낯.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도덕적 정체성.
한국사회를 개혁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때 정의를 외쳤던 86세대의 정치적 실패는
사회전체에 냉소주의 패배감, 좌절감을 안길 수도 있어요. 다시한번 변화를 위한 86세대의 노려이 필요한때임.
독일이라는 다른 사회를 통해 한국 사회를 객과적으로 보게 된 시간.
한국이 왜 이렇게 됐을까요? 분단과 반공주의와 냉전이라고 하는 상황
70년 가까이 이어진 분단체제가 대한민국을 기형사회로 만든것은 아닐까..
다음주 2강에서는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의 문제에 대한 우리가 몰랐던 통일의 모든것을 알려준다고함!!
<출처: jtbc 차이나는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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