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37주년 광복절이죠. 태극기 게양 하셨나요?
한국 역사에 큰 유산을 남긴 은인부터 코리아 러버까지~ 한국 덕후들
자칭타칭 한국 홍보대사까지 총집합
한국을 자기나라만큼 아끼고 희생한 외국인들~ 대한외국인들의 한국사랑기~
뜨거운 한국 사랑으로 SNS 팔로워 수 58만명임
미국 애틀랜타 추린이 울프 슈뢰더는 게임 스타크래프* 마니아이자 아마추어 캐스터로 활동함
2011년 한국 e 스포츠 인터넷 방송 해외 중계진으로 참여함
처음엔 게임으로 한국사랑이 시작됨 게임 캐스터로 활동하며 한국에 정착하게된 울프가 대한 미국인이 된이유는?
라면, 삼겹살, 김밥, 감장탕에 무료 소주까지... 좋아하게됨
2017년 중국 상하이로 출장간 울프는
미국 전통 음식은 한국 음식처럼 건강하지 않을거 같다고
울프 슈뢰더의 최애음식은 부대찌개인데 동료 해설가의 권유로 부대찌개를 처음 맛본 그는 운명임!
부대찌개와 면 사리의 찰떡궁합에 폴인럽~ 부대찌개 덕후로 등극
이걸 먹어야 고향에 온 것 같다고
연말에는 어려운 이웃에게 라면 기부까지함
한식으로 꽃피운 한국사랑~ 진정한 대한 미국인 울프 슈뢰더.
한국 사랑을 전 세계에 알리는 할리우드 배우들~
휴잭맨의 한국사랑은 이미 유명하죠?
휴잭맨의 아버지는 출장 차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데 항상 전통 기념품과 먹거리를 사왔다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소년 휴잭맨의 방에는 태극기가 여동생은 한복을 입었다고
어린시절부터 한국사랑이 컸던 휴잭맨은
해외에서도 i love seoul 이 적힌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고함
또다른 한국 러버 스타는?
주짓수, 킥봉싱, 가라테등 다양한 무술을 즐기는 그녀는 딸 에버가 3살이 됐을 무렵에 태권도부터 교육함
자연스레 태권도를 배우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는데 집에서 직접 불고기 요리까지 한다고함
그녀의 한국사랑에 감동한 팬들은
고마운 한국 홍보대사들~ 한국 많이 사랑해주세요.
2011년 용산주한 미군 기지에서 열린 한국어 웅변대회에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한 미군의 연설이 있는데
미국인 마이클 페레스로 현재는 제대후 한국인과 결혼해 가족들과 한국에 거주중이라고해요.
그가 자칭 한국 덕후가 된 이유는 일반적으로 한국인들도 갖고 있지 않은 시대별 화폐를 다수 보유함
*튜브 채널에서 한국 돈의 역사를 알려주는 마이클 페레스~
심지어 돈의 역사와 배경을 잘 알기 위해 한자 6급 자격증까지 땄음.
그의집에는 시대별 한국 화폐가 무려 7000개 이상이고
시대별 화폐는 기본이고 2002년 월드컵 기념주화에 광복 70주년 기념 독도 메달등
의미있는 기념주화까지 수집함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7년 주한 미군으로 한국에 파견되면서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당시 기름제거 활동에 참여했는데
한국인들의 정과 사랑에 크게 감동한 마이클은
이후 개인 인터넷 방송을 통해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으로 방송을 시작함
더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돈과 역사를 소개중임
한국을 진정으로 아끼는 파란눈의 한국인 마이클 페레스~
2004년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6가 일대 주택재개발 정비구역 지정으로
그런데!!!
" 한옥은 낡고 뒤떨어진 집이 아닙니다."
" 한옥에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재개발을 강요하지 마세요!" 라며 한옥 철거를 지켜낸 사람이 있다?
미국 뉴욕 출신의 피터 바살러뮤인데
그의 한옥 사랑은 50년 전부터 시작됐는데.. 1968년 교육 봉사를 위해 미국에서 파견된 그는
나무와 흙으로 지은집으로 자연과 가장 가까운 한옥
1975년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6가에 있는 한옥을 구입해 정착했다고..
지붕 기와 보수는 물론 유리 창틀을 떼고~
집 너무 이뿌네욤...ㅎㅎ 역시 집도 정성을 쏟아야..이뻐지는거같아요.
2004년 그런데 그가 거주하는 곳이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됨 하루아침에 한옥 철거 위기에 봉착함
이에 맞서 2007년 12월에는 피터 씨와 주민 20여명이 무려 1년 6개월간 이어진 힘겨운 소송 끝에
한옥 지킴이가 되어 준 피터 바살러뮤
그는 경남 밀양에 있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 취업을 했는데 미얀마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누구보다 성실히 일한그 한편 타지에서 온 윈톳쏘를 가족처럼 여긴 동료들
한국 생활을 한지 햇수로 어느덧 7년인데
한국 정착을 꿈꿧던 윈톳쏘는 지난 1월 작업 중 실수로 넘어지며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외상성 경막하 출혈로 뇌출혈 진단을 받은 그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는데..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진 윗톳쏘의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가족들은
상의 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린 누나
평소 윈톳쏘를 챙겨주는 한국인들에게 늘 고마웠던 가족들은 동생의 뜻도 같을거라고 여긴 것.
결국 난치병 환자 4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떠난 그..
한국 정부에서 윈톳쏘 가족에게 약 5백만원 지원금을 전달함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미얀마의 청년 윈톳쏘
그가 한국에 남긴 사랑은 영원히 따뜻한 빛으로 남을 겁니다.
경기도 성남 매일 오후 4시만되면 한 건물 앞에 늘어서는 줄!
앞치마를 두르고 사람들을 반기는 외국인이 있는데
국내 최초로 노숙인을 위한 저녁 무료 급식소인 안나의집!!
한국 생활 29년차 이탈리안 빈첸초 보르도
19세에 신부가 된 그는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을 함 1990년 사목 활동을 위해 한국에 오게된 그는
성당부설 독거노인 점심 급식소 평화의 집을 운영햇는데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노숙인 급증으로 급식소운영이 어려워 진것. 암담했던 그때 그 시절...!
어느날 김하종 신부를 찾아온 한 신자가
정말 고맙게도 건물을 무료 임대해줌 신자 어머니의 세례명은 안나고
노숙인 급식소를 안나의 집으로 이름 짓게 된 사연임
올해 4월을 기준으로 이곳을 찾은 노숙인들 수 200만명이상임
무료급식 외에 노숙인의 자활까지 돕는 안나의 집
노숙인의 아버지가됨. 마음을 다해 노숙인을 도운 김하종신부
이제 진짜 한국인이 됨
"한국이 제게 큰 사랑을 주었기에 어려운 이웃들과 나눌수 있었어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잠든 서울망우리공원
특히 식목일에 더욱 한 묘가 북적이는데
일제 강점기 무렵 매우 극심했던 산림수탈로 민둥산이 된 조선을 푸르게 만든
1914년 조선총독부 산림과에서 수목 연구를 했는데
그런데 일본의 무단통치로 경제수탈이 있게되고 일본의 만행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을 목격함
자신이 일본인인 것조차 큰 자괴감이 드는데..
그때부터 조선인처럼 살기로 결심을 함
조선말을배우고 흰색 바지저고리 고수해 일본 경찰들이 조선사람으로 오해해 무시하고 조롱까지 했다고..
반대로 당시 친일파들은 일본 사람처럼 하고 다녔잖아요.
일본의 살림 수탈이 심해질수록 초라해지는 조선 땅을 안타까워한 그는 조선을 푸르게 만드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은 뒤 밤낮없이 조선의 수목을 연구
노천매장법은 물에 담근 종자를 젖은 모래와 심는 방법으로 발아율을 높이고 발아 시기를 당길수 있어요.
노천매장법으로 우리나라 인공림 약 9%를 푸른 잣나무가 차지함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위해 양묘강연을 하던 아사카와는 안타깝게도 과로로인한 급성 폐렴에걸린뒤
갑작스레 41세를 일기로 하늘로 떠난 아사카와 다쿠미~
2017년 부산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찾은 한 일본인이
"제가 한국에 와서 사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 후쿠오카현 <병사, 서민 전쟁자료관>의 부관장인 다케도미 지카이 그가
진심 어린 사죄를 한 이유는 2002년 임종을 앞둔 다케도미 아버지의 유언이
" 하늘로간 나의 전우가 이 여성에게 꼭 사고 하고 싶다고 한다...."
"나 대신 이 여성을 찾아 꼭... 사죄해다오!"
아버지가 준 사진속 여인은 부산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미얀마에 근무한
아버지의 전우로 당시 그곳에 십여 명의 위안부 여성이 있었는데 패전한 뒤 일본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전우는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큰 죄책감에 괴로웠던 것.
위안부 피해 여성을 향한 사죄의 마음을 대신 친구에게 유언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하지만 전우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아버지가 또다시 아들 다케도미에게 유언을 남긴 것.
안타깝게도 위안부 피해여성은 찾지 못했지만 아버지 친구분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수소문끝에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연락을 해
미얀마 일본군 위안부 유물 기증식을 개최함
무려 한 세기를 지나 위안부 피해여성을 향한 진심 어린 사죄와
유품으로 받은 위안부 피해 여성 사진등 약 30여점의 자료를 기증함
다케도미가 유물을 기증하며 남긴말이
" 과거를 외면하는 자는 현재가 보이지 않고
과거를 새기지 않는 자는 또다른 위험에 빠질수 있습니다."
지난 과오를 반성하는 일본인들이 더욱 늘어나길 바랍니다.
2012년 2월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동원을 대신 사죄한 한 일본인
진심어린 모습을 보여준 일본인의 정체는
193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가 기울어지자 일본 교토의 한 빈민촌으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이 패배자야! 우리 발닦개나 하라고!
일본인이 재일 한국인을 대놓고 조롱하자 그모습에 크게 분노한 그는
1968년 전쟁의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을 돕기로 결심함
그때 청계천에 사는 6만 여 명의 빈민들을 마주했는데 너무나도 열악했던 청계천 판자촌의 일상
청계천 끝자락 송정동부터 시작된 노무라의 빈민구제활동은 빈민들을 돕기 위해 가장 먼저 한일
도쿄에 있는 집을 처분해서 고아들을 위해 청계천에 탁아소를 설립
ㄱ
주민들이 처한 현실, 그리고 소소한 일상까지..
청계천의 실상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고 사진을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의 실상을 전파함
독일, 호주 등 해외 곳곳을 다니며 꾸준히 모금활동을 전개해서 20여 년간 빈민 아동 2000여 명에게 무료 급식을 지원해줌
형편상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들에겐 치료비를 지원해줌
50번넘게 무려 10여 년간 서울을 일본을 오가며 한국의 빈민 구제에 힘쓴 노무라 모토유키
일부 우익성향의 일본인들에게 갖은 협박을 받기도함
청계천의 성자이자 빈민의 아버지인 노무라 모토유키 하지만 그가 봉사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 사죄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출처: otvN 프리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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