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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프리한 19~10위부터 1위까지 한국을 사랑한 대한 외국인 19

by 로토루아8 2018.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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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 [잡다한 이야기] - 한국을 사랑한 대한 외국인 19, 프리한 19~11위까지


2011년 145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당시 전 국민을 들뜨게 한 반가운 소식이었죠.

1866년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대한 프랑스의 반응이

당시 매우 강경한 반대입장이었는데 프랑스 정부 부처간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음

이때 외규장각 반환에 앞장선 한 프랑스인이 있는데

파리 7대학교수인 마르틴 프로스트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뒤

약 30년간 한국학과 교수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강의를 하고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문화정책 담당관을 맡기도함 그녀가 외규장각 반환에 앞장서게 된 이유는?

1993년에 방한한 프랑스 전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은 당시 외규장각 반환을 약속했는데

그러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음

파리 7대학, 13대학 인근 대학의 총장을 비롯해 주변 지식인들을 설득해

외규장각 의궤 반환 지지협회를 구성하고

프랑스 언론에 외규장각 의궤 반환 관련 기고문까지 게재함

2011년 영구 임대 형식으로 겨우 제자리를 찾은 외규장각 의궤

2015년 11월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공헌을 인정

명예 한국인이 아닌 진짜 한국인이 된 그녀!!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또 다른 히로인, 감사합니다.


1991년 4월 서울을 찾은 한 일본인 노인이 찾아간 목적지는 서대문형무소인데

 "서울이 많이 변했지만 여기는 그대로인 것 같소"

1928년 함경북도 나남 보병연대 보충병으로 소집되어 처음 조선에 오게된 그는

제대후 흥남조선질소비료공장에 취직을해서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가 된 이소가야는

조선인 하숙집으로 이사하게되고 조선 청년들과의 만남으로 180도 인생이 달라지게됩니다.

하숙집의 정체는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아지트였음.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들의 이야기로 점점 민족 차별과 부당한 노동 현실에 눈을 뜬 이소가야

1931년 조선 청년들과 함께 노동조합 건설을 추진함

일본인 인부 담당 비밀리에 일본인 조합원을 모집하고 노동자 신문의 일본어판을 담당함

1932년 노동자의 날 투쟁을 준비 중에 그만 일본경찰에 발각되었고

식민통치체제 유지법인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이소가야와 동료들

안타깝게도 힘든 옥살이에 굴복한 일부 조선인 동료들 하지만 끝까지 일본 경찰의 뜻에 굽히지 않은 이소가야

함흥 형무소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지내다 1941년 1월 약9 년만에 세상 밖에 나온 이소가야

영원한 조선 노동운동가들의 동료인 이소가야 스에지

1991년 56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고 서대문 형무소에 다녀간 뒤 그가 남긴 말..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그러나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독립운동가 김구,엄항섭, 안공근, 김철은 일본경찰에 쫓기게 됐는데

그런데 그들이 피신한 곳은 한 외국인의 집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 그가 아니었다면 김구가 잡혔을지도...

무려 한 달간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준 선교사 피치 그러나 점점 수사망이 좁혀오고

결국 은신처가 탄로난 위기의 순간

독립운동가들을 중국인으로 변장시킨 뒤 자신의 아내와 부부행세를해 도피할 것을 제안함

덕분에 무사히 상하이를 빠져나간 김구

게다가 일본 경찰에 불법 체포된 한국인 석방 운동까지!! 특히 안창호의 체포 소식에

" 다른사람의 영장으로 체포한뒤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프랑스 언론에 안창호 체포의 불법성을 폭로함

조선 독립에 힘쓴 그를 위해 1952년 문화 공로훈장 1968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함

대한 독립의 숨은 조력자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 그 아름다운 이름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1954년 4월 17일 당시 26세인 맥그린치는 

선교목적으로 제주도를 방문했는데 1948년 발생한 참극

제주도 4.3사건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 및 무력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1만여명이 좌익으로 몰려 희생당한 사건이에요.

설상가상 1950년 민족 최대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함 여러 참극을 겪으며 피폐하게 변한 제주도

제주도의 아픔을 지켜본 고 맥그린치 신부는 생계가 막막한 제주도민을 위해 잘 살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기르는 흑돼지를 발견하고는

" 이 돼지를 제대로 키워보자!" 

그의 고향 아일랜드는 목축업이 발달했고 또한 수의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축과 친근했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하게됨

맥그린치 신부는 수행을 다녀오던 중  새끼를 밴 암퇘지 한마리를 구입해

4H클럽이라고 농촌 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적인 청소년 민간단체로

도민들에게 암퇘지가 낳은 새끼돼지를 나눠준 뒤

분양료 대신 새끼 돼지를 받는 조건으로 시작함

초반에는 새끼돼지를 팔거나 잡아먹은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자립을 도운 그

결국 돼지 한 마리가 1만 마리의 기적으로 바뀌게 됨

그리고 6년 뒤인 1961년

현재 성이시돌목장의 전신인 이시돌 중앙실습목장이 설립되었고

제주도 목축업 발전에 큰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고하네요. 목장의 규모가 커질수록 제주도민의 일자리가 많아지고

자립을 위해 제주도 최초! 신용협동조합과 가축은행을 기획함

수익금은 소외 계층을 위한 복지시설 설립에 사용된다고해요.

맥그린치 신부의 희생에 감동한 제주도민들은 


제주도에 보여준 그의 헌신과 노력에 

올해 6월에 법무부에서 고 맥그린치 신부에게 명예국민증을 헌정함

낯선 땅 제주를 위해 평생을 바친  맥그린치 신부

1912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을 찾은 선교사 윌리엄 린튼

현재 군산 제일고인 군산 영명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지도하며

일본인에게 무시당하는 조선인들을 목격함

1919년 군산 영명학교에서 태극기와 기미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3.1 군산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휘함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인 윌리엄 린튼은 이후 전주 신흥학교 교장이 된 윌리엄 린튼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하게됩니다.

일본군이 교장 린튼에게 학교 대표로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

그러나 윌리엄의 선택은 자진폐교함  윌리엄 린튼이 보여준 한국 사랑의 시작은

윌리엄의 장인인 유진 벨 선교사 때부터 전해 내려온 거라고해요.

유진 벨의 딸인 샬럿 벨과 결혼한 윌리엄 린튼

이후 한국을 돕겠다며 가족 모두 한국에 정착을 함.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은 6.25전쟁때 해군 장교로 복귀해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함

휴의 첫째 아들 스티브 린튼은 1994년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하고

400억원 이상의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북한에 지원하기도 함

1980년 5.28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영어 통역을 자처하기도 하며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함께 감내해온 그는

결국 2012년 특별귀화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고

4대에 걸쳐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국을 사랑한 이들 그 뜨거운 의지와 희생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1890년 의료 선교활동을 위해 조선에 온 로제타 셔우드 홀은 조선 여성들이 처한 슬픈현실을 마주하게되었고

유고사상으로 남녀유별이 극심해 의료 교육은 물론 여성들은 아파도 진료를 받을수 없었음

그이유는 의료인들이 전부 남자였기 때문인데

1891년 이화학당 학생 5명과 의료수업을 시작했고

1928년 우리나라 최초 여성의사 양성기관인 조선 여자 의학강습소를 설립함.

그리고 로제타의 또 다른 업적은 1894년 평양에서 한 기독교인의 딸 복녀를 알게 됐는데

교육등 장애 때문에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로제타는 미국식 점자를 훈민정음에 맞게 개선을 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을 제작

" 조선인들과 일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자 기쁨입니다." 라고 말하는 로제타 셔우드홀

순위관계없이 반드시 꼭 기억해야 할 대한 외국인들의 사랑

일본 목사가 30년동안 편지 쓴 이유

일본의 끊이지 않는 망언과 역사 왜곡 이때마다 일본 정부에 항의 편지를 보내는 한사람이 있는데


1967년 일본 나고야에서 목회 생활을 시작했고

" 사람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고?"

제암리 학살 사건 1919년

경기도 수원군에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일본군이 제암리 교회에 가두고 학살한 사건이에요.

일본인으로서 속죄하는 마음을 갖게된 요시다 고조

1981년 한국행을 결정!

일본의 만행에 칼보다 강한 펜을 들었다!

일본 대사관과 언론사 등에 일본 정부 비판 편지를 발송하고

2014년엔 정기 위안부 수요집회를 찾은 요시다 고조

게다가 한국에 있는 일본 유학생, 선교사와 함께

탑골공원, 서대문 형무소 견학을 하고 지금까지도 역사의 진실을 널리 알리는 중임.

한국인들에게 큰 울림을 준 일본인 목사의 진심


대한민국 독도 지킴이 호사카유지

뻔뻔하게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그런데도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항상 외치지만 한편으론 타당한 근거를 내세우지 못하는데

타장한 논리로 무장하고 독도는 한국 땅을 외친 일본인이 있어요.

양국의 자료를 대조해서 일본이 반박할 수 없는 논리적인 증거를 제시한다고.

2005년 시마네현 다케시마의날을 제정하고

일본 고지도들을 모아 일본 고지도에도 독도는 없다를 출간함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함

2010년 일본 고유영토론을 반증하는 대일본전도 원본을 공개함

대일본전도는 1877년 일본 육군 참모국이 제작한 지도로 독도가 표기돼 있지 않음

사실 일본 당국에서도 이런 내용을 모르고 공개했던거죠.

1995년 Y대학교의 시간강사로 재직 당시에

" 독도는 누구의 땅입니까? " 라는 한 학생의 질문에

역사적 사실 앞에 말문이 막힌 그는

2002년 독도 문제의 미해결 문제 고찰로 첫독도 관련 논문을 발표함

현재는 독도영유권 분야 권위자가 된 호사카 교수

2014년엔 독도와 동아시아 사이트를 개설했고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참배등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어요.

2013년엔 대한민국 홍조근정훈장을 수상받음


" 감정으로는 독도를 지킬수 없습니다.

공부를 해야 지킬수 있습니다.!!"


  한센인과 동고동락한 38년

우리나라의 어려운 이웃들과 동고동락한 푸른눈의 외국인

스페인 출신인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 한국이름은 유의배

1976년 한국에 오게된 그는 1980년 경남 산청군 성심원 주임신부로 부임을 함

150여명의 한센인과 중증장애인들이 모여사는 사회복지시설인 성심원에서

인사 하나에도 애정이 듬뿍듬뿍임

활동이 어려운 한센인 부모를 대신해 아이들의 부모역할까지 해주고 아이들에게 인생멘토임

한편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에 평생을 바치게 된 이유는??

유의배 신부는 독일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스페인 게르니카 출신으로

라디오를 통해 6.25 전쟁 소식을 접하며 한국에 연민을 품었다고함

올해로 73세인 유의배 신부는 두차례 교통사고를 겪은 뒤 현재는 오른팔 마비 증세와 함게 손의 감각도 무딘 상태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1위 소록도에 사랑을 뿌린 천사들

한자로 작은 사슴 모양의 섬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소록도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저주받은 땅으로 불린 곳!

2005년 11월 소록도에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섬 전체가 큰 슬픔에 빠지게됨..

" 저희가 천막을 접어야 할때가 왔습니다. 여러분께 무척 감사합니다.:"

1950년대 오스트리아의 간호학교를 졸업한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한국의 한센인 마을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에 소록도행을 택함

무려 43년간 그들이 보낸 기적의 손길

의료진조차 환자와의 접촉을 꺼리던 시절에 진심을 다해 한센인들을 품어줌

맨손과 입으로 피고름을 짜내기까지했다고.. 살신성인 정신을 보인 두사람은

그결과 한세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 세울수 있었다고..

그런데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들은 수녀가 아니었는데  부족한 의약품은 기족들을 통해 조달받고

비자 문제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할 때면 모금활동을 펼치기도 했다고 후원금으로 결핵 병동과 목욕탕 등

복지 시설도 설립함 어느덧 43년이 흐르고... 은발의 70대 할머니가 된 두사람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고향으로 떠난 두사람

늘 그들의 사진을 보며 감사하는 소록도 사람들

현재 전라남도와 마리안느와 마가렛 재단에서 두사람의 봉사정신을 기려

노벨 평화상 추천 추진중이라고하네요.

<출처: otvN 프리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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