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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일타강사, 심용환의 조선시대 천민의 삶. 조선시대 노비가 일타강사가 되다?

by 로토루아8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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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까지도 중요한 화두였던 노비문제, 신분의 벽을 뚫고 한 줄기  빛이 된 사람들.

신분제의벽을 넘고 자신을 증명한 노비.

 

 

양반의 스승이 되었던 노비가 있습니다. 그사람은 바로 정학수. 

양반을 가르친 노비, 정학수. 조선시대 출셋길은 오직 하나뿐이죠. 바로 과거 급제인데 3년에 한번씩 서른세 명만 뽑고 문과는 소과 , 대과를 거쳐  33명을 최종선발하죠. 

 

 

이 사람들은 다 5등안에 든 사람들이라고 해요. 출셋길이 바늘구멍보다 좁아요. 

1차 시험인 소과는 진사시(시와 문장 능력을 평가) 생원시는 유교 경전 해석 능력을 평가한다고 해요. 1차 시험에 합격했을 뿐인데 평생 진사, 생원 칭호를 듣게되죠. 소과를 통과하면 성균관에 입성하게 됩니다.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부터 도서관, 약방, 기숙사까지 갖춘 성균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시는 공간이자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곳이죠.

기숙사 생활을 하며 대과를 준비한 유생들. 

성균관이 있는 동네에 거대한 서당이 들어섭니다.  기록에 의하면 평범한 서당이 아닌 거대한 서당.

18세기 후반인 정조때 성균관이 있는 동네에 거대한 서당이 들어섭니다. 

 

 

수업을 알리는 종을 칠 정도로 큰 규모였는데 100여 명이 교육을 받은 곳이라고 해요. 그런데 서당의 훈장님이 노비였다!!

노비가 성균관 근처의 초등 교사였던 것. 수많은 양반, 평민들의 자제들이 노비인줄 알면서도 배운 거죠.

정학수가 살던 동네는 반촌이라고 불렸는데 종로구 명륜동 오늘날의 성균관 대학교 일대라고 해요.

 

 

반촌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냥 노비가 아니라 성균관으로 출퇴근하고 성균관 유생들의 밥을 짓고 기숙사 불 때고 이런 일을 하는 노비가 사는 동네가 반촌이에요. 반촌이 남다른 이유는 아직 관료는 아니지만 국가 요직을 맡을 성균관 유생들, 그래서 유상들을 특별 대우 했던 조선.

 

 

왕과 신하가 의견이 엇갈릴 때, 신하들의 반대가 점점심해지면,  호곡권당이라고해서 성균관 유생들이 곡소리를 내며 시위를 했다고 해요. 절대 권력 임금도 이럴땐 항복을 하고 했다고 해요. 나중에 다시 논의하더라도 학자들을 거스르는 것은 일단 조선에서 용납이 안돼요. 그만큼 조선은 유학의 나라고 공부하는 유자들을 대우해줬어요. 

반촌의 노비는 성균관 유생을 모시는 노비로 반촌만의 특수한 성격이 있죠.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에요. 반촌에서는 왕의 특명 없이는 죄인도 체포가 불가해요. 성균관이 자리한 곳인 만큼 더욱 존중받았던 반촌.

 

 

정학수도 반인이었다고 해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잖아요. 신분을 넘어 학문으로 통한 유생과 정학수.

반촌 안에서는 신분을 넘는 커뮤니티가 형성되었고  정학수가 서당을 연 송동은 명당이라고해요.

 

 

왜냐하면 그곳이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의 집터였고, 후에 정학수의 사당을 거쳐 1925년 보성고등학교가 그리고 1987년 개교한 현재는 서울과학고등학교라고 하네요. 최고의 수재들이 모이는 서울과학고. 

 

 

어떻게 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해요. 남아 있는 기록은 정학수가 양반과 어울렸던 기록과 서당이 크게 운영됐다는 단편적인 기록뿐, 서당을 열기까지 필요했을 양반의 동의와 후원. 안타깝게도 자세한 기록이 없어 그래서 더욱 빛나는 픽션의 가치. 역사만으로는 완벽한 드라마를 만들 수 없죠. 정통 사극도 기록의 빈 부분은 작가의 상상으로 완성하죠.

 

그리고 반인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

조선 초기부터 사대문 안에서는 농사가 금지였는데 노비라서 급여가 없는데 농사도 못 짓는 반인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정육점을 운영했던반인들은 조선전기 도축은 백정만 할수 있었던 일이죠.

소전 전기에는 소가 많지 않았어요. 게다가 조선은 농본주의 국가로 소는 농사일에 꼭 필요했죠. 그래서 소고기를 쉽게 먹을 수가 없었어요. 

어느날, 몰래 소를 잡으려 했던 양반댁, 행복한 소고기 파티가 시작되려던 그때, 현장을 급습해 체포했죠. 그만큼 소고기는 목숨을 걸고 먹어야했다고 해요. 반인들이 성균관 유생들 식사를 책임진다고 했었잖아요.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영양을 공급해야하니까, 조선 조정에서 아주 예외적으로 반인들에게 도축을 허용합니다. 

파격적인 특혜죠. 소를 잡으면 유생들 음식으로 대접하지만 남은 고기와 부산물을 내다 팔고, 그 부수입으로 생활하게 된 거죠. 반촌만의 특별한 분위기가 형성되죠. 유생들과의 유대관계와 넉넉한 수입.

 

 

소를 죽이지 말라는 법을 어기고 반인들에게 소를 죽인 죄를 물어요.

사실 속내는 세금징수라고해요. 부를 축적할까봐 벌금을 부과, 성균관 학비는 무료인데 성균관에만 오면 명예, 숙식을 해결할 수 있죠. 성균관 유지비용을 처음에는 국가 예산으로 지원했는데, 조선 후기에는 반인들에게 걷은 세금으로 운영을 했다고해요. 

성균관들을 지탱한 건 반인들이라고해요. 성균관 노비들이 조선 왕조의 힘이었죠. 노비들의 피와 땀으로 키워낸 훌륭한 인재. 그래도 반인들은 출세하지 못하잖아요. 최대 출세가 정학수가 서당 만든게 전부니까 그에 대한 한이 있었던 것 같아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노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숭정의숙을 설립합니다. 그 장소가 현재는 서울 혜화초등학교라고 하네요.

작은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천민, 억울하고 한스러운 노비의 삶.

 

출처: 일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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