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배웠던 내용들을 퀴즈로 풀어보리고함!!!
정답은 대마도임.
비속어로 많이 쓰이는 이것은?
정답은 무데뽀.
조총을 개량한 철포의 일본식 발음인 데뽀. 막무가내, 무모로 순화해 사용해주세요.
정답은 정묘호란임.
삼전도의 굴욕, 삼배구고두
1500년 한,중, 일 역사를 명쾌하게 정리해 역사를 통해 현실 외교의 해법을 모색한 한명기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3년전 강의하고 다시 온거라고.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외교 상황.
대외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들, 일본 경제보복, 사드 문제까지 현재 진행중이죠.
지난해 12월 중국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전염병을 막기 위한 입국 제한 여부를 놓고 한, 중, 일 관계는 더 복잡하게 꼬여가는 중이죠.
그 배우에 뭐가 있냐면 미중 패권경쟁이 있음.
통상 무역 관세등 경제 분야에 집중됐던 문제들. 교수님이 주목하는 대목은 지난해 8월 중거리핵전력조약을 탈퇴한 트럼프.
1987년 미, 소 냉전 종식의 계기로 맺었던 INF.
미국의 탈퇴로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데
즉각 발끈한 중국.
아직 예단할수 없는 상황이지만 미, 중 패구건 경쟁의 여파..
만약 정치, 군사적으로 비화한다면...? 미국 중국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될수도 있다고..
지난 시간 선생님이 강조한 내용이었음.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한반도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가지 자세가 필요하다고함.
주변국 동향을 민감하게 주시하는 예민한 촉.
그 촉을 바탕으로 얻어진 판단을 기준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대비하라!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양식과 혜안.
우리나라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외교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온 한반도. 특히 강대국들의 권력 교체기 당시
조선이 처했던 위기 상황. 돌파하려고 시도했던 오늘의 주인공.
최명길, 그는 충신인가? 역적인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국제정세 격변기 당시 남달랐던 한 인간이 보여준 행적과 사상.
최명길을 돌아보는 시간을 준비한 선생님.
남한산성 영화를 보고 알게됐다고. 청과 화친을 주장하는건 역적으로 인식
신하 최명길은 청이 요구하는 항복조건을 정하고 급기야 왕을 청나라 황제 앞으로 데려가 무릎까지 꿇리게 되죠.
어떤 인물이란 생각이 듭니까?
지금도 의견이 분분히 갈린거처럼 실제로 극과 극으로 갈렸던 평가.
백성과 임금을 살린 충신. 혹은 나라와 임금을 판 역적.
오랜시간 최명길을 따라다닌 꼬리표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간신,
최명길은 왜?? 하늘처럼 섬긴 왕을 무릎 꿇렸을 까?
배경을 시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임진왜란이 끝난뒤 17세기 초 급변하기 시작한 주변의 국제상황.
그때 조선의 문제적 군주가 등장함.
조선의 제 15대왕 광해군. 1608년~ 1623년까지~
지금도 미, 중 사이 줄타기 외교중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성리학을 배웠던 지식인들은 후금= 오랑캐라고 생각함.
반면 명은 부모의 나라+ 은인이라고 생각함.
그들의 눈에 광해군은? 명의 은혜를 배신한 패륜아!
주변국 명과 후금(청)정보를 수집한 조선. 상대방의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해도 이미 쏠려있던 마음.
안들림.
정보 그대로 해석하기가 불가하죠. 결국 광해군을 몰아내는 정변이 발생함.
바로 인조반정. 최명길도 인조반정에 참여를 해서 1등 공신이 돼요.
최명길 38세임.
신하가 무력으로 왕을 쫓아냈다? 정당성이 약했던 인조정권.
그만큼 간절했던 누군가의 승인.
친명배금이 인조정권의 외교정책이 된 것.
친명배금으로 인조를 세운 1등공신 최명길이 14년뒤 인조를 청에 무릎 꿇렸잖아요.
이것이 최명길의 장점 혹은 위대성임.
권력을 잡은 세력의 목표는 권력을 유지하는 거죠. 각자 자신의 이익부터 찾기 마련임.
그러나 한발 앞을 내다본 최명길은 급부상한 후금의 침략을 우려함.
광해군의 외교지만 계승할 필요성을 느낀 것.
95%는 광해군을 비판한 척화파. 단 5%만 중립을 주장한 주화파.
철저한 소수자였던 최명길. 소수파가 예상했던 대로 국제정세가 변해갔던 것.
퀴즈 풀때 정묘호란 문제가 나왔잖아요. 1627년 후금이 경제적 이유로 조선을 침략함.
최명길 42세
후금의 군사력을 당해낼수 없었던 조선. 인조는 서둘러 강화도로 피신하게 됩니다.
후금은 당시 해군이 없었어요.
한편으로 명이 부담스러웠던 청은 조선과 청 양쪽의 이해관계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세를 나눔. 이 과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최명길이에요.
후금은 만나서도 안된다는 척화파.
당시 척화파의 생각은 명과 관계만 유지할수 있다면...
17세기 빠르게 세력을 확장한 후금. 반면 더 수세에 몰리게 된 명.
후금은 급기야 황제 칭호를 쓰기로 결정함.
1636년 2월 소식을 전하러 온 후금 사신들.
병자호란 10개월 전 청 사신 용골대 일행이 입국을 함.
입국 소식을 들은 95%의 척화파들.
짐승같은 오랑캐가 감히 황제?! 당장 목을쳐 명나라로 보내라고함.
겁먹은 용골대는 서둘러 도주를 하고
앞서 청으로 향하던 용골대 일행은 왕의 명령서를 탈취한거에요.
조선이 대비를 안한건 아니에요.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준비한 조선. 반면 생각이 달랐던 최명길.
병자호란 4개월 전.
현실적으로 청군을 이길수 없었던 조선.
지금이라도 다시 청에 사신을 보내서 청과의 형제 관계 복원을 주장한 최명길.
가만있을수 없었던 척화파.
그사이 속절없이 흐른 시간.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이 얼자마자 청은 조선 침략에 나서게 된다.
1636년 병자호란 발발 최명길 51세.
단 5일 소요.
이에 맞서 조선이 준비했던 대비책은 유사시 성에 들어가 막겠다는 계획임.
청군 기맏가 허를 찌른 겁니다.
조선군이 지키던 산성은 프리패스. 대로따라 서울로 직진을 함.
조선 전력을 꿰뚫고 있던 것. 9년전 정묘호란의 실패를 기억한 청.
청의작전 둘. 인조를 잡아라.
1636년 12월 14일 청이 서울에 진입한 당일. 강화도로 가던 중 숭례문 앞에 도착한 인조.
청군선봉대는 양철평에 도착함.
한강에서 배를 타야 강화도에 갈수 있는데 강이 얼었어요.
강화도행은 포기하고 결국 인조가 향한곳은 남한산성임.
이 과정에서 드러난 최명길의 진정성.
불과 몇시간 전에 숭례문에서 발이 묶였던 인조.
청군 진영으로 갈 것을 자원한 최명길.
청군 목을 치자던 척화파들. 호위병 20명을 함께 보낸 인조.
그런데 숭례문을 나서자 모두 도주함.
홀로 청군 진영으로 향한 최명길. 엄연한 전시상황이에요.
최명길의 의도가 들통난다면 그자리에서 처형당할거에요.
그런데 이들을 기다리던 남한산성은 춥고 배고팠던 곳.
식량은 약 45일 치뿐. 극심한 추위도 문제임.
온몸에 퍼진 동상으로 손발을 절단하는 병사가 속출함.
남한산성에서 무신 을이 있었을까?
병자호란 발발 3일.
청의 세자 출성 요구의 소식을 전하는 최명길.
척화파 김상헌은 최명길의 목을 베라며 반발하고.
왕에게도 떳떳한 죽음을 맞으라 요구하는데.
한시가 급했던 상황인데 명분 싸움, 말싸움만 하고.
95%의 척화파와 5의 주화파.
1637년 1월 1일 청태종(홍타이지)는 서울에 도착함.
직접 서울까지 내려온 청태종은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의지죠.
급기야 포병까지 투입을 함.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판단을 함.
국가가 보전된 다음에야 와신상담도 할수 있는 법- 최명길.-
결국 인조와 함께 항복 국서를 작성함.
조각난 국서를 다시 주워 모은 최명길.
" 국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되지만
국서를 주워 맞추는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최명길.
1637년 1월 30일 삼전도로 내려가게 되는거죠.
병자호란 발발 47일.
청이 조선땅을 두고 돌아간 이유는?
병자호란 8개월 전 열린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
조선의 두 사신도 참석함. 일제히 절을 올린 각국 신하들.
조선 사신은 안한거임. 버티는 조선 사신을 보고 만주, 몽골, 한족 신하들이 어떻게 볼까?!
체면을 위해서라도 조선의 항복이 절실해진 것.
조선을 벼랑 끝까지 내몬 청. 예상 밖의 복병인 천연두가 창궐.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전염병. 그런데 만약에 척화파 주장대로 끝까지 저항했다면?
역사에서 가정은 상당히 어려운데 1631년 대릉하성을 공격했던 청나라.
처음엔 말을 잡아먹기 시작. 다음엔 말 안장을 끓여먹고 서로를 잡아먹는 일이 발생함.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끝까지 저항했다면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어요.
홍타이지가 부하들을 남겨서 혹은 조선을 청에 편입시켰을 수도있죠. 변발을 요구했을 가능성도 있고.
1645년 양저우에서 청에 끝까지 저항했던 명나라. 80만명이 학살당하게 되는데.
그런면에서 조선은 최악은 피한 셈이죠.
결국 조선의 종사를 살린 것!!
최명길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없었을수도 있겠네요.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 창경궁으로 돌아간 인조.
그런데 항복보다 죽음을 택해야 한다던 척화파 김상헌은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버립니다.
왕과 뜻이 다르다며 귀향을 함. 다른 척화파도 대부분 고향으로?
왕과 신하들의 아들을 인질로 끌고 간 청. 그때문에 신하들 사이에 벼슬을 거부하는 풍토가 발생함.
반면 비난속에서 소신을 지킨 최명길. 오직 나라만을 위한 헌신은 더 어려웠을텐데..
최명길이 걸어온 정치 인생 그걸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죠.
최명길 20세에 과거에 급제합니다.
조선역사에서 드물게!! 1년안에 진사시, 생원시 동시 합격.
증광문과까지 급제 3관왕. 알고보니 공부천재임.
그런데 병약한 몸에 발목 잡힌 최명길. 벼슬살이를 못 했을 정도임.
신은 타고난 기질이 몹시 약하여... 거의 죽을뻔한것이 7,8년
그의 장래성을 높이 평가한 스승 신흠. 사윗감으로 욕심을 냈지만 후손 복이 없을 것을 우려.
결국 사위 삼기는 포기함.
신체적으로는 병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최명길.
1612년 마침내 병조좌랑에 임명.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요.
당시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폐모살제를 저질렀던 때.
명에 알려질 것을 우려한 광해군.
명나라 사신 감시를 지시함. 그런데 명의 사신 근처를 지나던 한 취객.
현장에서 긴급체포를 함.
사건 책임자가 병조좌랑 최명길임. 별일 아니라고 판단해 최명길이 석방을 결정.
격분한 광해군이 최명길을 체포함.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떠나게 된 최명길.
가평으로 유배된 최명길은 인생 2막이 시작됩니다.
최명길 29세.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지천은 강물이 느리게 흐른다는 의미에요.
마음을 다스리고자 독서에만 집중한 최명길.
대성리 시절 주역을 수천번 정독을 함. 대부분 점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흐름을 예측하는 학문임.
사람과 시대를 읽는 능력을 터득하게됨.
절친 장유와 함께 공부한 또 다른 학문은 양명학이에요.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보고 자기 판단을 하는 본원적인 리가 있다.
바로 양지.
평민이든 양반이든. 양지는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것.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이죠. 벼슬에서 쫓겨난 5년의 유배시절.
시대를 보는 감각을 키워 진정한 현실주의자로 거듭났던 것.
넓은 판을 읽는 최명길이 탄생하다.. 인조반정이후 최명길이 받은 벼슬은 이조좌랑임.
인조반정 공신이니까 이후 이조참판으로 승진을 함. 인사행정을 담당했던 최명길.
홀로 담다른 결정을 하기 시작함.
광해군대 무장출신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한 이괄.
인조반정 당일 잠시 동요했던 군대. 이들은 알정시키고 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이괄.
그래서 공신자리에 올랐는데 2등 곤시에 머물게 된 이괄.
이괄은 거기서 열 받은 거죠. 심지어 서울발령도 아님.
후금이 쳐들어오면 싸우라고 하는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발령시킴.
분기탱천한 상태로 부임한 이괄. 최명길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최명길이 본 이괄이란 인물은? 대의명분에 공감한 참여가 아니고 부귀영화와 벼슬을 노린 것뿐.
그의 손에 군대를 맡긴다?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수 있어요.
이괄을 가까이 두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
최명길의 반대를 무시하고 변방으로 보내짐.
최명길 39세.
인조반정 성공 불과 1년도 안돼 이괄의 난이 발생함.
이괄의 난은 조선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데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서울을 점령함.
인조는 충청도 공주까지 피신함. 그만큼 정확하게 이괄을 분석했던 최명길.
최명길이 찬성했던 박엽은?
게다가 광해군과 동서지간임.
광해군의 특급 총애를 받았던 박엽. 누구든 마음에 안 들면 가차없이 처단을 함.
잔인하고 포악했던 박엽.
반면, 또 다른 기록은 중국어에 능통함.
사람보는 안목이 뛰어났다는 평가.
인조반정 성공으로 왕이 바뀌고 숙청대상 1호가 된 박엽.
이때 홀로 노를 외친 최명길.
조선에 닥칠 가장 큰 위협. 후금의 침략.
박엽을 기용해 후금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함.
인재풀이 협소했던 조선. 능력있는 사람은 활용해야 한다고 판단한 최명길.
결국 사람을 보내서 박엽을 목을 베어 죽입니다.
그이후 수개월 간 시간만 흘려보냈던 조선.
최명길 51세.
조선에서 군사원조를 얻어내고 조선을 잘 설득해서 조선과 청 대결을 부추길 목적임.
다음달 귀국길에 오르게 된 황손무. 조선에 편지 한통을 남겼는데..
오랑캐를 상대할 때 의리나 명분은 없어요.
오는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기미정책은 적절한 현상 유지 정책을 의미하는거에요.
황손무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청과 싸울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을 함.
형편없이 약한 군사력. 전쟁 준비도 전무했던 조선. 게다가 도대체 알수없는 신하들의 생각.
애초에 싸움 붙이러 갔지만 절대 청과 섣불리 전쟁하지 말라.
조선이 비록 비실비실하긴 하나
그뜻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명을 위한다면 내 의견을 따라라.
조선의 척화파 95%의 해석은?
황손무 얘기는 말이 안된다는 것.
병자호란 발발 4개월 전. 명나라 사신도 싸우지 말라 당부했건만..
보다못한 최명길이 다시 제시한 해법.
전쟁시 청군이 제일 먼저 도착할 곳은 압록강.
항복을 하더라도 거기서 할거 아니에요.
압록강에서 패배하더라도 전쟁은 종료되겟죠.
왕이 강화도로 피신한다면 피신한 소수 인원만 안전.
99%의 백성의 운명은 청의 칼날 앞에 놓이는 상황임.
어영부영 시간 끄는 사이 결국 압록강 물은 얼고 청군은 공격을 시작할텐데 어떻게 할 것인가.
채 피신하지 못한 많은 백성들이 청의 칼날에 희생을 당하게 되죠.
전쟁이 끝난 뒤 또다시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 최명길. 승려 독보를 명에 보낸 것.
명나라와 밀통을 주도하다.
최명길 53세.
아직은 명나라가 망한 상태가 아니니까. 청과 화친만 고집할수 없었던 것.
만약 대역전이 일어나면. 본때를 보여주겠다!
혹시모를 보복을 우려했던 것.
그래서 파견된 승려 독보. 독보를 통해 당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고 명에게 사과의 뜻도 전달함.
그런데 명나라는 어떤 미련을 버리지 못했냐면 명과 청 대결에 조선 도움을 받으려 한 것.
그래서 조선을 이해하는 태도를 취한 명.
최명길이 독보를 보낸 사실이.. 결국 들통남.
가장 금기시하는..ㅠㅠ 청 입장에선 뒤통수를 친거죠.
1642년 청나라 심양으로 소환된 최명길.
최명길 57세.
밀통 사실에 충격을 받은 청. 조선판 블랙리스트를 작성.
반청 세력 배후에 김상헌이 있다.
1641년 김상헌도 심양 감옥으로 이송됨. 특히 큰 충격을 받았을 김상헌.
병자호란 국서를 찢었던 김상헌. 반면 국서를 이어 붙였던 최명길.
진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우국충정이었구나.
비로소 최명길의 진심을 깨닫게된 김상헌.
희생의 아이콘인 최명길이 추구한 것은?
병자호란이 남긴 최악의 비극. 10만에 육박하는 무고한 백성이.
피로인. 적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을 말해요.
1637년 한겨울 철수길에 오른 청군. 약 700km 를 도보로이동하는데 피로인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할까요?
그 가능성은 희박하죠.
게다가 탈출 시도가 발각되면 보복이 돌아옴.
살해, 발꿈치를 자르기도함..ㅠㅠ 가장 시급했던 피로인 문제 해결.
민심 수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했던 일이에요.
그래서 등장한 방식이 속환임.
10냥이면 쌀 수십 가마니임.
포로로 끌려간 이들의 가족은 높은 벼슬아치부터 일반 백성까지 다양했는데
높은 벼슬아치나 돈 많은 사람은 하루빨리 가족을 만나고 싶은 생각에 수십개 속환금을 지불함.
어떤 문제가 생기겟어요? 부익부 빈익빈.
전반적으로 부풀려진 몸값.
몸값을 마련할수 없는 백성은 가족을 데려올수조차 없었던 것. 그때 최명길이 나서요.
그는 왜 속환 원칙을 제시햇을까?
마스크가 금보다 귀해진 요즘 시국과 비슷해요. 만약 마스크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민심이 뒤숭숭해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속환 원칙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 또하나 돈도 가족도 없는 피로인은?
심양에서 조선까지 와야하는데
돌아오는 동안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도 난관임.
맹수로부터의 위협까지!! 어렵사리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더라도 청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고비였던 것.
유일하게 해결하려고 나섰던 인물이 최명길인거에요.
청과 협상을 해서 돌아오는 길목에 숙박시설 설치를 제안.
피로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추진함. 철저하게 현실에 발을 디고 있었떤 것.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에요.
실제로 청에 마구잡이로 끌려간 여성들. 우여곡절 끝에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이들을 기다리던 또 다른 칼날.
비속어로 된 과정은 또 살펴봐야겠지만 본래 뜻은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 환향녀.
최명길의 절친인 장유 역시 며느리가 환향녀가 됐는데
환영은 커녕 비난이 쏟아지고 대다수 척화파들의 분위기는 환향녀와의 이혼 허용을 주장함.
나라가 힘이 없어서 입는 피해. 고국에서조차 냉대와 외면을 받았떤..
피해 여성들의 책임도 아니고 귀향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조선을 원망하며 평생을 보내게 될수도.
이건 인간이 해서는 안될짓이라고 절친 장유의 부탁에도 이혼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함.
디테일한 속환 정책까지!!
시대를 앞서간 인물 최명길.
성리학적 명분론이 뿌리내리고 있던 조선사회. 죽어야 하지만 살아난 임금 인조.
천하의 간신 최명길. 조정도 더렵혀졌다고 비난받음.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울거에요?
병자호란에서 가까스로 구해놓은 나라.
비난과 조롱이 넘쳐났지만 오직 고통받는 백성만 바라본 최명길.
비록 모두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조선 사람 모두를 살리고자 했던 최명길.
주변 동향을 철저하게 살피는 날카로운 촉. 과거를 반성하는 징비 정신. 노회할 정도의 전략적 마인드를 가져라!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면서 책임감과 희생정신. 유연함과 융통성. 그리고 전략 마인드를 지녔던 사람.
현실에 발을 딛고 대안을 제시한
병자호란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김상헌.
지조 높은 행동이었지만 김상헌이 어떤 문으로 나갔나?
최명길이 목숨 바쳐 열어놓은 문으로 나갔다. 닫히려는 문을 몸을 던져 연 사람이었다.
이게 오늘의 결론입니다.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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