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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어쩌다어른2019 설민석 근현대사 특집2부

by 로토루아8 2019.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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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대사는 눈 깜박할 사이에 변화했죠.

동족 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우리의 조상들은 굉장히 가난해서 그땐 피죽도 못먹고 살았어요.

미국 부대에서 버려진 소돼지 부산물로

고픈 배를 채웠던 꿀꿀이죽.

운좋으면 고깃덩어리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보통 돈벌이가 안되는 날은 꿀꿀이죽이다. 단돈 10환이면 철철 넘게 한 그릇을 준다.

잘 맞아 들면 큼직한 고깃덩어리도 얻어걸리는 수가 있지만

1952년 경북 한 곳을 갔더니 동리 사람의 대부분이 쑥도 먹지 못하고 굶어 몸은 터지게 붓고 심지어 흰 흙을 여러가지 풀잎과 같이 씹고 있다...

솥에 맏알 곡식이 들어가지 못한 지가 40일이다 혹은 60일이다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죽을 근력도 없어


너무나 가난했던 6.25전쟁 직후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던 말인데 어린 민석은 가슴이 찢어진다는줄..알았다고

하지만 소화불량은 기본이고 덤으로 변비까지.. 변이 나오다가.. 항문이 찢어지는거에요. 진짜 못 살았어요.

당시 우리나라 GDP 경제수준은?

2018년 기준으로 지금은 세계 11위

안창호 선생이 말했던 민주주의는 우리는 황제다.

찢어지게 가난한 그때도 잊지 않았떤 대한민국의 본질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

민주주의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1960년 4월 19일 평범한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인 4.19혁명

초대 대통령 임기는 4년이에요. 근데 한번 하고나니깐 더 하고 싶었나봐요.

헌법 개헌을 통해 4년을 더함 4년임기에 한번 중임이 가능하지만 총8년 했으니 이제 더는 출마 못해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죠....ㅠㅠ

" 내가 아니면 안돼" 세번이고~ 네번이고~ 그리고 다섯번이고~ 영원한 대통령을 꿈꾼 이승만

하지만 헌법을 바꿔야 가능해요.

사사오입 개헌은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 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현재 헌법개정은 국민 승인이 필요하지만 당시 국회의원 3분의 2이상 찬성하면 헌법 개정이 가능했어요.

당시 국회의원 수는 203명인데 

개헌안 통과를 위해 136명의 찬성이 필요함.

이승만 대통령이 속한 자유당은 개헌안 통과를 확신했죠. 왜냐면 자유당 의석수가 과반수였기에 다수의 찬성표 확보를 예상했죠.

개헌안 투표 당일날!! 투표 결과 135표 찬성으로 부결됨

1표 차이로 더는 출마할수 없게 된... 하지만 포기를 몰랐던 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을 탄생시킵니다.

반올림아시죠?  사밑으로 버리고 5이상은 올린다해서 사사오입.

소수점 뒤가 4밑이니 버리자!! 이렇게해서 135명은 가결!!

억지 주장에 힘을 싣고자 수학과 교수에게 자문을 함 그래서 사사오입 개헌으로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됨.

자유당엔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엔 신익희와 장면 이렇게 나왓는데 선거전 민주당 신익희가 사망함

이제 승리를 확신한 이승만. 그런데 신익희의 표는 무소속인 조봉암에게 가게되죠.

무소속임에도 많은 지지를 받았던 조봉암 그래서 진보당을 창당하게됩니다.

부통령에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하게됨.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생으로 1956년에 80대 초반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사망한다면? 야당에 정권이 넘어가게 되잖아요.

둘다 죽여버려야겠다묘... 평화통일 주장항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진보당 강제해산을 시킴

요 내용 수능시험에 잘나온다고해요.

다음 선거 결과가 아닌것은? 1. 진보당 등록취소 2. 부마항쟁, 3. 조봉암사망4. 경향신문폐간

답은 부마항쟁이죠.

그렇다면 민주장읜원인 장면은? 총격으로 살해를 시도함 민주당 전당대회 현장을 기습해서 총맞췄는데... 맞고 살아났어요.!

1960년 3월 15일 4대 대통령 선거에 조봉암 사망으로

선거 한달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조병옥 후보 그래서 이승만은 사실상 당선 확정됨.

이번 선거 자유당의 목표는 대통령은 문제없으니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드는게 문제임.

이기붕 부통령 만들기 대작전으로

유권자 대상으로 3~9인조 조를 편성한 후 조장이 조원들에게 말하길~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으라고

강제 공개 투표를 진행하고 제대로 투표했나 검사까지 하고 4할 사전 투표로 선거날 투표하지말고 놀러가라고하고

이러니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율은 올라가죠.

샌드위치라해서 개표 작업 시 투표지 100매가 한 묶음인데 여당 표 다발 사이에 야당표 혹은 무효표를 쓱 넣음

그리고 개표 도중 정전시키는 수법까지..

3.15선거 개표중인데 득표수 조작은 물론  개표장이 정전된 틈을 타 투표함 통째로 바꿔치기하고

각종 편법이 동원된 부정 선거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에 당선

부정선거 반대 시위는 1960년 2월 대구에서 시작해 

대구에서 벌어지게 된 배경이 주로 선거 유세는 일요일에하는데 민주당 유세 현장의 학생들이 꼴 보기 싫었던 모양임

급기야 유세장 못가게 일요일 등교를 강행함 

학생들의 심기를 건드린 등교령으로  학교에가니 단체 영화관람이나 하고 시미어 토끼 사냥을 시키기도 했다고

이를 계기로 학교 정치 도구화 반대 시위가 일어나게됨. 이후 마산으로 확산



해방 직후 12세이상 인구가 문맹률이 약 80%였어요.

이승만 정부가 추친한 초등 의무교육으로 문맹률을 낮추는데 기여함 그런데 이게 부메랑이 돌아옴

국민들의 반발은 교육정책으로 길러낸 학생들이 본인의 치부를 들춘격이에요.

또한 당시 미 군정을 거치며 긴 논의 끝에 미국따라 6-3-3 학제를 채택해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이렇게 되는데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과 고등교육을 통해 생겨난 비판의식으로 젊은이들 손에 쥐어진 정의의 깃발.

대구 학생 시위가 마산으로 퍼진 결정적 계기는? 

자유당 공천 및 당선보장과 기업경영권약속등 정치공작을 벌인 의원에게 격분을 함

마산 시청 앞 부정선거 항의를 하게되면서 혁명의 진원지가 된 마산

전국시위로 불을 지핀 것은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때문이에요.

목숨을 잃은 억울한 시민

더욱 격해진 시위 현장에 무차별적으로 총격 진압.

한때 교사의 꿈을 꿨던 김주열 열사

제자들의 훌륭한 선생님이 되었을 텐데.. 그러나 그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60년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  전라북도 남원 출생인데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마산상고에 지원을 하게 됨.

합격자 발표 확인 차 집을 나섰다가 그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김주열이 사라졌다?! 행방불명이 되어 어머니인 권찬주 여사가 마산을 오게됨.

주열이를 찾아 헤맸지만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다쳐서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나타났지만 우리 아들 주열이는 없었습니다.

마산 시내 곳곳에서 울부짖던 어머니는 끝끝내 아들을 보지 못하고 약 한달뒤 일단 남원으로 돌아가기로함..

밤마다 아들이 꿈에 나타나 눈이 아프다고한다고..  눈을 못 뜨겠다고..

남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거짓말처럼 전해진 아들의 소식.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노심초사.. 하고 잇엇는데 시신이 차가운 바다에서 떠오름

눈에 최루탄이 꽂혀있다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참혹함에 ..

사고 당시 시신을 바다에 유기함 그래서 애타게 찾아도 못 찾았던 이유죠.

실종 약 한달여만에 발견하게됨

온 국민을 분토케한 사건이에요. 경찰은 김주열의 시신을 몰래 빼내 구급차에 실어 고향 남원으로 보내려했지만 권찬주 여사는 단호하게 거절함 고향에 대려오지 말고 부정선거 당선된 이기붕이 집에다 묻으라고.

아픈 마음을 아들과 함께 묻으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꾹꾹 눌러 담고 남긴 한마디

" 제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내일의 새로운 세대를 뒷받침하는 이나라의 어머니로서 다시한번 옷깃을 여밈시다.

- 김주열군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글월 中

김주열의 친척이었던 고려대 학생인 김수철에게 사실을 알린 권 여사

청년들의 본노를 깨운 김주열 열사의 죽음

시위후 학교로 돌아가던 중 폭력배가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구타 시작함

수십 명의 학생들이 피 흘린 사건...으로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함.

죄없고 소중한 학생들이 맞아 죽어가는걸 볼수 없다.

분노한 시민들은 경무대로 밀려들기 시작했고 선거재실시와 하야을 주장함

무차별적 실탄을 사격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하죠. 수많은 사람이 사망한 4월 19일

끊임없이 싸운 시민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시위행진

나도 모르겠다! 거리로 출동 온국민이 하나되어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를 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죠.

한편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맏아들 이강석에 의해 일가족 동반자살을 함

과도한 욕심으로 멈춰야할 때 멈추지 못하고 권력을 탐한 자들의 비참한 최후..

대한민국의 민주화에서 빼놓지 못할 이야기들이 있죠.

4.19 의 또 다른 주인공들

어머니에게쓴 여중생 진영숙 양의 편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목숨 바칠 각오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나이죠.

버스에서 시위하다가 경찰 발포로 사망했어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채 눈을 감은 진영숙 양

이승만 하야 당일인 4월 26일 초등학생들도 시위에 가담을 함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 대지 말라! 당시 초등학생이 쓴 시가 있는데..

잊을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 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거같아요.

4.19혁명 많은 사상자들 중 하층 노동자들이 많았던.. 가진것없고 잃을 것 없는 자들이

혁명의 중심에서 죽어갔고 임시정부의 정신을 증명하듯 싸워서 지켜낸 민주주의

반드시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불법 개헌을 통해 12년 장기 집권함 그리고 1960년 벌어진 3.15부정선거

부정선거에 분노한 마산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시민들을 진압하는 경찰들의 발포와 무차별 폭행

4월 11일에 마산의거에서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커지고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됨

국민들의 분노가 절정에 이른 4월 19일 대규모 시위가 전개됩니다.

마침내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하야 성명 발표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낸 4.19 혁명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큰 초석이 되다.

힘든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리. 민주화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기적.

6.25전쟁과 4.19혁명으로 혼란했던 대한민국

어떻게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이룰수 있었는지?

한강의 기적하면 떠오르는게 박정희 대통령이잖아요. 그리고 뒷받침했떤 기업들도 존재해요.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용? 노동자들이에요.

꿈을 안고 도시로 올라왔던 노동자들은 비교적 미성년자와 어린 여성들이 취업이 쉬웠어요.

값싼 임금과 쉬운 착취...하루 노동시간이 보통 14시간 이상이에요. 심지어 휴일도 보장되지 않았던 것.

너무나 열악했던 환경

보조원을 거쳐 재봉사로 승진한 전태일 그러나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할때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음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인식해 찾아보니 근로기준법의 존재도 발견함

법과 상관없이 착취당하던 노동자들.. 그래서 노동운동에 합류합니다. 돌아오는건 핍박과 탄압뿐..

시각에 다라 달라질수 있어요!!

경제적 시각에서 보면 기적적인 승리에요. 분배의 시각으로 보면 실패에요.

그 과정에서 분신.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려 더 나은 처우로 향하는 발판이 되었죠.

당시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광부 파독 근로자들의 외화벌이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에요.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경제군사 원조확보 .

산업화과정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지켜냈던 농민들도 있죠.

많은 이의 숨은 노력이 이뤄낸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낯선 이국땅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들..

빠른 경제 성장 뒤에 숨겨진 힘겨운 노동의 현실

" 사흘 밤이나 잠 안 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펴지지 않는다'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스물 두살의 노동자 전태일

1970년 11월 한 노동자의 피어오른 외침.

한강의 기적 눈부신 경제성장 뒤에는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국가를 재건하며 신흥경제국으로 우뚝 서게 되고 풍족해진 현재에 머물지 않았죠.

한강의 기적으로 이뤄낸 경제 발전의 빛 또다시 드리워진 그림자..

유신체제의 등장.

민주주의가 후퇴하기 시작했죠. 경제적으로 잘 살수만 있다면 자유, 인권 규제 정도는 괜찮다.

박정희는 군인출신으로

약 3년간 군정을 실시했고 국민이 투표하는 대통령 직선제로 당선됨

1967년 제 6대 대통령 취임.

중임제한 철폐는 이승만 대통령때만 해당하는데 ... 이분도 또 하고 싶은 거에요.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 또 한번의 좌절이 오고

3선 연임을 위해 단행된 삼선개헌.

반대 시위와 비판 난무 속에도 국민 투표 실시 결과 삼선 개헌 통과되고

제 7대 대통령 선거 출마 자격을 획득함 그런데 이때 희대의 숙적이 등장합니다.

심상치 않은 야당 후보~~ 말도 엄청 잘함~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꺾고 대선 후보로 출마를 함

연설도 기가 막히게 잘했다고 대통령시절.. 조금씩 쉬어서 말하기는 생각하기 위한 자신만의 루틴이었던 것이라고.

제7대 대통령 선거 결과 약 95만 표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 박정희 확정.

세번했으니 만족했겠지? 싶지만...아뇨.. 또 하고 싶습니다.!

경제발전과 산업화 추진의 명분으로 제 8대 대통령에 또 도전함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분단이후 최초 남북한 합의서죠.

우리는 조속한 시일 내에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민족대단결의 원칙하에 통일하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북한 방송에도.

조국의 평화통일 저만이 할수 있습니다.라며..

자연스럽게 유신~ 카드를 쓰윽~ 내밈.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힘을 보태주십시오.

대통령 직선제 폐지!

우리나라는 대의정치로 간접 민주제에요.

국가의 대표가 대통령이고 대통령의 권한1. 군사 통치권.

2. 행정부 수반

세금관리 및 정책 집행 기관인 행정부

3. 공무원인사권

국민의 대표인 국회는 1 행정부를 감시. 국정감사를 하죠.

2. 법을 제정하는 입법부,

유신체제에 등장한 통일주체국민회의로 사실상 국민의 투표권이 상실되고 개헌의 최종 결정권 역할을 하게됨.

제 8대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함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약 2500여명 투표를 실시! 절대적 찬성으로 당선됨. 결국 4선 대통령으로 취임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만든 유신정우회

여당 과반수 이상 의석 확보하는 시스템이에요. 무조건 여대야소의 구조인데 사법부에 대한 권한까지~

당시 법관의 임면권을 가진 대통령 그래서 정부 눈치를 볼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삼권분립의 원칙을 파괴하고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함. 한번에 6년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유신정권의 상징이 된 긴급조치.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해 대통령이 발령한 특별조치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 2호를 선포

긴급조치 1호는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행위를 금지함

헌법의 개정,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

위반시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수색을 함

긴급조치2호는 긴급조치를 위반한 자를 처벌하는 비상군법회의 설치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시행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했으니... 1973년 남북 관계마저 단절됨

UN에 각각 가입하자고

북한의 대화 단절로 협상이 결렬되고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남

북한군들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함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분단 이후 최초 통일 3원칙을 합의함

그러나 정권 강화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한계가 있음

통일을 위한 노력은 인정하지만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

1967년 제 6대 대통령 1971년 제 7대 대통령 1972년 제 8대 대통령 1978년 제 9대 대통령

18년간 장기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

가발 수출 업체로 수출 15위로 대기업으로 급성장함

가발 수요 감소,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됨

대부분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로 만만하니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희생됨 쫓겨날 위기의 노동자들은

폐업 철회와 임금 청산을 요구하기로 결정함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 농성에 돌입 하지만 때는 유신때잖아요.

진압과정에서 옥상에서 추락사한 여성 노동자가 있음

당시 신민당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에요.

1979년 뉴욕타임스 기자회견 중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를 주장함

기사를 보고 화가 난 박정희는

지역감정의 골이 깊었던 시기죠. 광주 목포에서 주로 지지했던 정치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어요.

부산마산에서 주로 지지했떤 정치인은 김영삼 전 대통령임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사태 파악을 위해 내려간 사람은?

박정희의 권력 구도를 보면 제 3의 인물은 국군 보안사령관이에요.

군대내 중앙정보부장

차기 대권을 놓고 알력다툼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암튼 김영삼이 제명된지 22일 후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말다툼이 발단이 됩니다. 총을 꺼낸 김재규는

차지철을 저격하게됨 이어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김재규

화장실에 숨어있던 차지철 확인 사살하고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경호실 직원을 사살함

10.26사태

박정희 암살과 차지철 사망 대통령 시해범으로 김재규 사형 선고됨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


다음주 이야기!!!


이제 절대권력중 남은 한사람은 전두환.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울부짖음이 시작됩니다.

당연하고 마땅한 권리조차 결코 용납될수 없었던 시대 처참히 짓밟힌 그들의 인권

곁에 있는 내 가족의 이야기 이기도 하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한주또 기다려야겠네용..ㅎㅎ 이런 역사 이야기 너무 재미있지 않나용?ㅠㅠ 우리가 모르고 지낸 것들이 너무 많아요.

알고 기억해야죠. 역사가 살아야 민족도 살아요.


<출처: tvN 어쩌다어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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