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명작이 있는 곳은 로마입니다. 바티칸시국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라고 해요. 사진을 보니 정말 엄청나더라고요. 사람이 일일이 하나 그렸다니, 얼마나 그리기 힘들었을지, 실제로 가서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초격차명작 두 번째: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호.
아담이 일어서면 키가 얼마나 될까요? 바로 4~5m라고 해요. 이 그림의 크기만 해도 가로 약 6m에 세로가 약 3m입니다. 일어섰을 때 4~5m로 추정된다고 해요.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만든 비슷한 크기의 조각상인 다비드상을 보면 높이가 무려 5.17m라고 해요.
5m가 넘는 무른 대리석은 세우기조차 어려운데 기술에서나 재료에서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던 거예요. 다비드상이 보여준 것은? 스케일이 남다른 초격차입니다. 거대한 조각을 만들고 거대한 천장화까지 남긴 미켈란젤로.
길이가 40.93m 폭이 13.41m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47장면의 그림, 누가 쉽게 도전할 수 있을까요? 당시 미켈란젤로가 친구에게 쓴 편지를 보면,
허리가 창자 속으로 파고들어 균형을 잡으려면 말처럼 엉덩이를 뒤로 빼야 하고 장님처럼 걸어 다니고 있어 너무도 비참해진 나는 예술가도 아니라네. 바로 벽화 그릴 당시의 자신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누워서 그렸다고 알려졌지만 대부분 서서 작업을 했다고 해요. 천장을 올려보며 그리다 보니 머리가 등에 붙을 만큼 휘고 입속으로 떨어지는 물감 탓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 수련과 수행의 시간이었다고 해요.
이 작품을 실제로 볼 때 대부분 놀라는 점이 뒷목이 많이 아프다고 해요. 잠깐 보는 것도 힘든데 5년씩이나 작업했다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굳은 의지 덕분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해요.
최근 복원하며 근접 촬영한 사진인데 조명을 강하게 비추자 드로잉 한 자국이 보였다고 해요.
실제로 그리면서 수시로 수정을 한 거 프레스코 벽화입니다. fresco는 신선하다는 뜻이에요. 석회 반죽을 벽면에 바른 후 그 위에 물감으로 채색하면 반죽이 마르면서 착색이 되는데 문제는 작업 과정이 까다로운 편이에요. 그래서 온종일 딱 붙어서 작업을 해야 해요. 하루 작업량 예측은 필수고 말라서 굳어버리면 다 긁어내야 합니다. 딱 가능한 만큼만 진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울퉁불퉁흔 드로잉 자국과 살아있는 붓 터치를 느낄 수 있죠. 멀리 서는 잘 안 보이지만 천장 가까이에서 본다면?
한층 인간미가 가득해진 작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작품이 되죠. 거대함이 느껴지는 넘사벽 작품이지만 한발 다가가면 보이는 인간의 손길과 인간의 향기.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죠.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색다른 세계를 선사하는 명작이죠.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이름을 알린 대표적인 작품이 피에타예요.
조각가로서 입지를 다져준 피에타, 섬세함 가득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이죠. 당시 미켈란젤로 나이는 20대였고,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릴 무렵, 또 한 번의 대작을 제안받습니다. 당시 교황인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무덤을 장식할 기념 묘비 제작을 의뢰합니다. 슈퍼메가급 묘비로 높이 8~0m 입상은 40점. 이에 좋아했다는 미켈란젤로.
조각에서 중요한 게 돌의 품질인데 대리석 광산 곳곳을 다니며 좋은 돌 찾기에 매진 중이었는데 슬프게도 프로젝트가 중단됩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건축 자문을 해주던 인물이 있는데 바로 건축가 브라만테라고 해요. 브라만테가 밀고 있던 화가는 재능 있고 어리고 심지어 성격도 좋은 라파엘로였다고 해요.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잡음을 만든 거라는 게 미켈란젤로 측의 주장이라고 해요.
그림 속 기존 베드로 성당을 허물고 새로 짓자고 제안하는 사람이 브라만테라고 해요.
프로젝트가 중단돼서 기분이 별로인데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리게 하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브라만테,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단칼에 거절하죠. 나는 회화 전문도 아닌데 나를 망신 주겠다 이거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해요.
천장화 프로젝트를 하면서 교황은 진행을 재촉했는데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면 끝날 때 되면 끝나겠죠 라며 심드렁한 대답을 하자 교황은 지팡이로 머리를 내려쳤다고 해요. 이에 미켈란젤로는 짐 싸서 곧장 고향으로 갔다고 해요. 어쩔 수 없이 달래기에 나선 교황은 체불 임금을 일시금으로 지급합니다.
어마어마한 돈의 힘, 4형제 중 둘째인 미켈란제로는 혼자 벌어서 먹여 살렸던 실질적 가장이었어요. 집안을 위해 일찍이 성공을 꿈꿨죠. 체불된 임금은 500 두카트고 요즘 시세로 따지면 약 5억이라고 해요. 결국 자존심보다 금융 치료를 선택했죠. 그렇게 다시 컴백해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완성합니다.
원동력 중 하나였던 돈, 그리고 라파엘로와의 경쟁심.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교황의 큰 그림이 느껴진다고 해요. 미켈란젤로가 작업할 당시 라파엘로도 인근에서 작업을 했는데,
나이도 미켈란젤로가 많고 프로젝트 성공 경력도 있는데 대표작도 없는 애송이 주제에 바로 옆에서 작업을 해? 라며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 시작되죠.
라파엘로 작품인 율리우스 2세 집무실 벽화에 아테네 학당이 있죠. 이 작품 속에 담긴 미켈란젤로에 대한 감정은?
아테네 학당을 그리기 위해 실물 크기의 도 로잉 작업을 보면
비어있었는데 계단 앞 중앙에 자리한 인물이 생겼죠. 바로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라고 해요. 바로 여기에 미켈란젤로를 투영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고 해요. 라파엘로가 본 미켈란젤로는 혼자 떨어져 턱을 괴고 앉아 골똘히 작업 중인 모습을 보이는데 라파엘로 입장에서는 미켈란젤로를 낯설고 먼 존재가 아닌 고독한 천재로 인정해주고픈 마음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고 해요.
라파엘로의 추격 능력은 상대의 기술을 습득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요. 브라만테와 고향이 같은 시골 출신 화가였던 라파엘로,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와 경쟁하며 더욱 성장해 대등한 실력을 뽐낸 라파엘로, 배우는 것도 능력이죠.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더니 다빈치를 능가하는 라파엘로의 표현력. 르네상스 3대 천재가 되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하지만 37세에 생을 마감한 라파엘로, 과로사를 했다고 해요. 뛰어난 실력 덕에 작업의뢰가 밀려들었고, 30대 후반에 한 작업만 해도 어떻게 다 했을까 싶을 정도로 아테네 학당을 비롯해 교황집무실 벽화, 성베드로 대성당 설계, 일종의 문화재 총장 같은 역할을 했다고해요.
사람들이 라이벌 관계임을 알고는 일부러 경쟁을 붙였을 정도라고 해요.
똑같은 사이즈 그림을 의뢰합니다. 프랑스 나르본 대성당 제단화 그림을 의뢰받은 피옴보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최측근인 피옴보 그림과 라파엘로 그림이 나란히 있으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사람들이 비교하겠죠.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장면이에요. 오른쪽 남자가 미켈란젤로가 그려준 인체 데생이라고 해요. 그래서 미켈란젤로 스타일 그대로 그리고 최측근이었던 피옴보는 철저히 미켈란젤로의 모습으로 작업을 하죠. 그런데 이때 라파엘로의 기량은? 바로 초격차.
아랫부분이 마귀 들린 아이를 치유하려는 사도들인데 라파엘로의 유작이 된 작품이라고 해요.
로마에서 실제로 보면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한다고 해요. 미켈란젤로와 시스티나 예배당의 인연이 있는데 천장화를 처음 그렸을 당시에는 30대였어요. 약 25년 후쯤 다시 돌아와 그린 또 다른 명작이 최후의 심판이에요.
중앙에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곤란했다고 해요.
바티칸 벨베데레 궁의 아폴론 조각상과 비슷하게 묘사했는데 건장한 몸과 손의 자세가 다르고 특히 얼굴 표현은 거의 일치했다고 해요.
예수가 그리스 신의 모습이라니 신성모독이라고 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해요. 더욱 논란이 됐던 것은 초기에 표현한 성인과 성녀의 모습인데 완전 누드여서 그리스 신처럼 그린 것도 모자라 성인 성녀가 누드로 표현해 거세게 비난을 받았다고 해요. 성당이 아니라 술집에나 걸려야 할 그림이라고 비판받았다고 해요.
미노스 얼굴을 비아지오 다 체세나로 지옥의 심판관으로 영구 박제합니다. 그리고 입구 바로 위에 그립니다. 창작자를 잘못 비판했다 당한 사례죠. 작품을 향한 어마어마한 비판으로도 모자라 파괴될 뻔했다고 해요. 교회가 허용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다행히 작품의 진면목을 알아본 일부 사람들은 싹 갈아엎는다면 문화 파괴자로 길이 남을 거라고 경고의 목소리를 냈고 다행해 유지 결정이 났다고 해요. 대신 상당 부분을 다시 그리는 조건이었다고 해요. 완전히 갈아엎는 대신 헐벗고 있는 인물들 모두 주요 부위에 옷을 입히기로 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벽화는 검열을 거친 결과물이라고 해요.
수정할 부분은 긁어내고 다시 그려 덮은 건데 미켈란젤로 사망 후 진행되었다고 해요. 이 작업을 진행한 화가들을 기저귀 화가라고 하는데 매일 앉아서 기저귀만 그리니까 그렇게 불렸다고, 파란 부분은 원래는 옷 벗은 채로 있던 남녀였는데 남성은 앞족을 보는 상태로 성행위를 연상해서 완전히 새로 그린 거라고 해요.
대폭 수정후 다른 그림이 된 최후의 심판, 명작이 고달픈 운명이죠. 르네상스의 거인이자 신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정교함을 뛰어넘는 극한의 아름다움, 그의 예술적 고집이 만들어낸 초격차,
사소한 것들이 모여 완벽함을 만들지만 완벽함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출처: tvN 어쩌다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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